12일 ‘오월공동체, 기억과 공감의 기록’ 42주년 세미나 박용수 석좌교수 “왜 5·18증언을 영상기록했나” 발제
광주YMCA5·18영상기록특위가 촬영한 영상 테이프. 박용수 석좌교수 제공
권영웅
입력 2022.05.11 11:13
오는 12일 광주5·18기록관실에서 열리는 ‘오월공동체, 기억과 공감의 기록’이라는 주제의 42주년 5·18민주화운동기념 학술세미나에서 36년 전인 1997년 5·18 생존자와 목격자 159명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한 광주YMCA 5·18영상 기록특별위원회 활동내용과 성과, 5·18 영상증언 방식과 활용방안에 대해 2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이날 박용수 한신대 석좌교수는 ‘우리는 왜 5·18증언을 영상기록했는가’라는 주제 발제에 나선다. 토론회 앞서 밝힌 발제 자료에서 박 교수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홀로코스트 생존자 5만 2000여명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해 ‘쇼아 영상박물관’을 설립한 것처럼, 광주에서도 5·18을 경험한 시민들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하자고 제안했다”면서 “당시 나라서적을 운영하던 고 진영수 대표가 꼭 필요한 일이라며, 1000만 원을 기부해 역사적인 5·18영상 기록사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진영수 나라서적 대표가 1000만 원을 쾌척하지 않았다면 5·18영상기록사업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진 대표는 5·18때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친동생의 한을 폴어 주고자 5·18영상기록 사업에 기부하게 됐다”고 기부배경을 설명했다.
고 진영수 대표. 박용수 교수 제공
박 교수에 따르면, 고 진영수 전 나라서적 대표의 친동생 진정태 씨(1954년생·당시 26세)는 경희대를 졸업하고, 나라서적 건물 한쪽에 새한레코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80년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오후 2~3시쯤 동부경찰서 인근 대의동 자택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총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옥상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가족들은 전 씨를 리어카에 싣고 전남대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숨져 광주시 북구 장등동 선산에 안장했다가, 2006년 5·18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진영수 전 대표가 운영했던 광주우체국 앞 나라서적은 1996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5·18때 총에 맞아 숨진 고 진정태 씨. 박용수 교수 제공.
광주YMCA 5·18영상기록특별위원회(위원장·고 이광우 전 전남대 교수)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간 5·18 생존자, 목격자 159명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했고, 이는 5·18기록물이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당시 광주YMCA 5·18영상특위는 김혜선 박사와 조찬천 촬영감독 등 영상전문가들로 영상 채록단을 구성, 전문 스튜디오에서 TV방송용 VHS와 베타캠 테잎을 사용해 고화질·고음질의 5·18증언 영상을 제작해 영상기록물의 가치를 더했다.
당시 영상채록단 팀장이었던 김혜선 박사(GIST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이날 세미나에서 ‘5·18영상 증언 채록 내용과 구성’이라는 주제발표 자료에서 “영상 촬영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상파 방송 다큐로 써도 좋을 정도의 고품질 영상 제작을 목표로 촬영해 단순한 기록 위주의 채록물과 확연히 다르다”면서 “앞으로 AR과 VR 영상콘텐츠로 활용하는데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박용수 교수는 “1980년 광주라는 특정한 도시공간에서 시민 학살과 결사항쟁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동일하게 겪었던 당시 80만 광주시민들의 집단적, 개별적 경험을 생생하게 영상으로 기록해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5·18영상 아카이브 구축과 함께 복합문화공간 ‘5·18라비키움’(도서관+기록관+박물관)건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영웅 기자 nicev@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