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검은 베레모’를 눌러 쓴 특전사 군인들은 광주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제11공수여단 등 특전사 부대원들은 착검한 채 총부리를 겨누고 호두나무 진압봉을 마구 휘둘렀다.
그로부터 43년이 흐른 지금.
불순분자들에 의한 ‘광주사태’는 대법원 판결 등에 의해 정권찬탈에 맞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했고 폭도로 내몰렸던 시민들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정부가 주관하는 5·18 기념일의 주인공이 됐다.
그날의 숱한 희생자들은 손수레에 실려 망월동 옛 묘역에 아무렇게나 묻혔다가 이제는 국립묘지로 승격된 5·18민주묘지에 안장돼 사후나마 명예를 회복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특전사 소속으로 ‘폭도’들이 들끓는 광주 땅을 밟았던 퇴역 군인들의 5·18민주묘지 참배 여부가 새삼 수면 위로 떠 올랐다.
5·18 현장인 광주지역에서 특전사 퇴역군인 모임인 동지회의 묘지참배 여부를 둘러싼 때아닌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포용과 화합’ 차원에서 5·18 이후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특전사 동지회와 5·18묘지를 합동 참배하자는 찬성론과 40여 년 동안 염원해온 책임자 처벌 등이 전제되지 않으면 면죄부를 주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반대론이 팽팽히 맞선 형국이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특전사 동지회 회원들을 끌어안고 ‘국민 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의견과 5·18 당시 집단학살을 서슴지 않은 발포책임자 등 계엄군 수뇌부를 처벌해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분출하고 있다.
황일봉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는 16일 “5·18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동지회와 허심탄회하게 만나 서로 아픈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5·18부상자회는 이에 따라 오는 19일 특전사 동지회와 함께 그날 이후 처음으로 5·18묘지를 합동 참배하기로 했다. 국헌문란의 난동을 진입하던 계엄군과 군홧발로 정권찬탈에 나선 쿠데타 세력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시민군이 사상 처음으로 5월 영령 앞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부상자회와 동지회는 합동 참배에 앞서 매년 1회 이상 5·18묘지와 국립서울현충원 합동 참배를 정례화한다는 행동강령 등을 담은 ‘대국민 공동선언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5·18민주화운동 첫 사망자인 고 김경철 유공자 어머니 임근단 여사와 특전사 출신 장교 임성록씨가 모자(母子) 결연을 하는 이색 행사도 곁들인다. 이와 함께 5·18을 상징하는 민중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과 특전사 군가인 ‘검은 베레모’를 제창하면서 43년 만에 진정한 화합의 무대를 연출한다는 계획이다.
공동선언문에는 5·18 정신 계승·발전에 서로 협력하고 5·18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당시 계엄군 장병을 돕기 위한 법적·제도적 지원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내용도 포함될 것으로 전해졌다.
특전사 출신 인사들이 5·18묘지를 공식 참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5·18부상자회 등은 지난달 1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계엄군 사망자를 함께 참배한 바 있다.
5·18부상자회는 “계엄군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노태우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며 “참다운 국민통합을 끌어내야 5·18 숙원인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배상, 기념사업 등 5대 원칙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특전사 동지회와 5월 단체가 만나 교류하는 게 진정한 진상규명의 시작이 될 수 있다”며 “당시 현장에 투입된 이들의 기록에 근거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암매장 장소 등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5·18 유족회와 오월어머니집 등 다른 5월 단체는 물론 광주시의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광주전남추모연대,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등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서면서 제동이 걸리고 있다.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반대여론이 확산돼 합동 참배의 명분이 사위어가는 모양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는 긴급 이사회를 연 후 발표한 양재혁 회장 명의의 결정문에서 “진정한 사과와 진상규명이 선결되지 않는 한 특전사 동지회와 함께하는 대국민 공동선언식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양 회장은 “과거 특전사 수뇌부 사과에 기대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당초 면담에 참석했으나 진실규명을 위한 양심선언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해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오월어머니집도 규탄문을 내고 “책임자들의 발포 명령과 암매장의 진실도 밝히지 않았는데 화해와 용서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고 비판에 가세했다.
광주시의회는 “특별법에 따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현재 조사하고 있는 당면 과제가 237건에 달하는 데 조사대상자이자 가해자인 계엄군을 포용하고 화해로 나아간다는 것에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참여자치21과 광주YMCA 등 24개 단체가 참여한 광주시민단체협의회도 “5·18 피해 당사자인 유족회가 불참 결정을 공식 통보했는데도 5·18 학살자들이 불렀던 군가를 제창하는 행사를 강행하는 것은 광주 영령들을 모욕하는 것일 뿐이다”고 밝혔다.
광주전남추모연대 역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하려면 올바른 진상규명이 먼저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며 “특전사동지회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계엄군을 대신한다면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부터 온 국민 앞에 먼저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단체는 “진솔한 자기 고백과 반성, 진상규명 협조가 이뤄진다면 언제라도 환영할 것이지만 진상규명 없는 그들의 방문은 오히려 오월 열사들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도 성명을 내고 “가해자의 사과가 있어야 용서도, 화해도 가능하다”며 “그렇지 않은 대국민 선언은 5·18의 가치를 훼손하고 아픔이 아물지 않은 5·18 영령과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5·18부상자회 등은 19일 특전사 동지회 회원 150여 명을 광주로 초청한 가운데 합동 참배와 대국민 공동선언문 발표를 강행하기로 했다. 5·18부상자회 등이 지방의회와 시민사회단체의 반대 기류를 ‘정면돌파’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자칫 찬반 단체 간의 물리적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특전사 동지회의 참배를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행사 당일인 19일 5·18묘지와 옛 묘역 입구에 대한 집회신고서를 경찰에 제출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민주주의 시발점이 된 5·18은 광주시민 모두의 소중한 자신으로 더 정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며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심정으로 충분한 의견수렴을 통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시민 박영수(61)씨는 “1980년 당시 고교생으로 금남로 등에서 5·18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봤다”며 “5월 단체가 사분오열돼 5월 영령이 잠든 5·18묘지에서 서로 반목하게 된다면 광주 시민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968228&code=611211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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